<미메시스(mimēsis)>
모방이라는 뜻. 플라톤은 감성계의 개별적 사물은 참된 실재인 이데아의 모방이라고 하고 이데아보다 낮은 차원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예술도 모방으로 이해하여 이데아의 영상이라고 하고 감성계의 모방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여 예술을 멸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예술을 모방이라고 하였지만, 언어, 리듬 등을 매개로 하여 모방을 하는 예술(서사시, 서정시, 비극, 희극, 무용, 음악 등)은 '성격이나 정서나 행위', 요컨대 인간의 마음의 내부를 모방하는 것이고, 개별적인 사태를 재현하는 경우에도 역사와는 달리 '개연적으로든지 필연적으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사태'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개별성은 보편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예술의 멸시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는 모방하는 것과 모방된 것을 즐거워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갖춰져 있는 것이라고 하여 여기에서 예술의 유래를 구하였다.
출처: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87829&cid=41978&categoryId=41985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문학의 본질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사용된 이 말은 흔히 재현(representation) 또는 모방(imitation)이라는 뜻으로 대응된다. 재현으로 이해되든 모방으로 받아들여지든 요컨대 미메시스는 문학이 여타의 예술과 마찬가지로 흉내 내기의 결과라는 생각이 소산시킨 개념이다. 흉내 내기라는 말 속엔 흉내 내기라는 행위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 평가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 흉내 내기에서는 진짜와 가짜가 구별될 수밖에 없고 참으로서의 존재와 거짓된 존재가 대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본질이 흉내 내기로 이해되고도 문학과 예술이 변호될 여지는 극히 희박해진다. 이러한 이해의 방식에서 문학과 예술을 변호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가짜와 거짓을 옹호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와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인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은, 문학의 본질이 외계를 모방하는 데 있다고 본 그에게서는 당연스런 논리적 귀결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과 예술이 모방의 결과라는 사실에는 플라톤과 생각을 같이했지만 모방의 대상을 보는 입장은 판이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가 모방하는 것은 가시적인 외계의 사물이 아니라 가시적인 사물들의 배후에 숨겨진 보편적인 원리라고 주장했다. 숨겨진 것을 모방한다는 주장에는 모방이라는 행위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모방은 단순한 흉내 내기가 아니라 발견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담겨져 있다. 그리하여 부정적인 가치로서 플라톤에 의해 배척되었던 문학과 예술의 본질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유익하면서도 생산적인 가치라는 해석을 얻게 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16, 17세기에 이르러 새삼 영향력을 넓힌다. 다시 말하자면 모방론은 고전주의시대에 와서 좀 더 확고한 자리를 잡는다. 고전주의 문학은 그 최고의 이상을 자연의 완전한 질서와 고결한 인간적 덕성을 모방하는 데 두었고 전 시대의 훌륭한 문학적 규범조차도 모방의 대상으로 삼았다. 훌륭한 문학적 가치는 문학 작품을 답습하고 모방함으로써 획득되어질 수 있다고 믿어졌던 것이다. 추론되고도 남겠지만 이러한 이상은 독창적인 가치와 개성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문학적 이상과는 조화되기 어렵다. 부연하자면 문학이 가치 있는 것에 대한 모방 행위라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원천을 두는 서양 문학사의 전통적인 믿음은 상징주의와 낭만주의 문학에 의해 거부되기에 이른다. 모방론은 창조론으로 대체된 것이다. 말하자면 모방론은 상상력과 개성적인 표현이 중시되던 낭만주의시대에 와서 일시적으로 그 설득력을 상실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상상력과 개성적인 표현이라는 것도 인간의 사회적 경험에 근거하지 않을 때는 의미를 갖기 어렵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하고 사실주의적 문학관이 대두하면서 모방론은 상실했던 영향력을 회복한다. 모방의 대상이 개연성이든 자연이든 또는 인간의 사회적 경험이든, 그것이 대상을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재현한다는 원리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부연하자면 리얼리즘은 모방론이라는 뿌리로부터 싹트고 발전해온 문학적 세계관이다.
출처: 소설학사전, 1999, 문예출판사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40230&cid=41799&categoryId=41801
하만이 '우울증'이라는 말을 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훨씬 고상한 의미에서다. "현세에서의 이 불안은 우리의 이질성에 관한 유일한 증거이다. 만약 우리에게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면, 우리 역시 신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사랑하는 자연에 넋을 잃고 있는 이교도나 선험적인 철학자를 조금도 뛰어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향수도 우리를 엄습하지 못할 것이다. 이 참견 잘하는 불안, 이 성스러운 우울증은 오늘날의 부패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희생 제물을 태우는 불인지도 모른다.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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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열어본 독서노트의 마지막 글귀이다. 우울이라는 감정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주었던 글귀. 김연수 작가의 '도넛' 은유 이전에 키에르케고르가 있었다. 2-3년 전쯤에 적어두었던 문장인걸로 기억하는데 왜 이걸 잊고 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