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양식/밑줄긋기
어느 개의 죽음
안녕마리
2011. 11. 7.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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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그 가혹함과 광대함을 두려워하던 대자연에 내가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중재자였던 것이다. 녀석을 통해서 나는 마음을 달래주는 자연의 속성들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침묵, 잠, 걱정도 후회도 없는 만족, 언제나 눈앞에 펼쳐져 세상을 감싸고 있는 햇빛, 발 아래에서 우연히 찾아낸 샘과 같은 것을 말이다. 녀석을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나는 진정으로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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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마지막 순간들을 보낸 그 방에 대해 쓰면서 나는 가족 중의 누군가가 죽음을 맞은 방은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어느 고장의 관습에 대해 생각한다. 그곳에선 방 안의 모든 것들이 죽는 당시의 상태 그대로 보존되고 아무도 그 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아마도 한 세대 정도가 지나가면, 그 집이 아무리 넓어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사용할 방이 남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관습이 왠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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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한 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러한 의문을 던지게 마련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고야의 그림 중에 여러 명의 의사들이 환자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있다. 그 표제는 <그는 어떤 병으로 죽을 것인가?>이다. 그가 죽을 것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죽음에는 어떠한 명칭이 부여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의사들의 관심사이다. 어쩌면 모든 이들의 관심사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절망적>이라는 선고를 내리고, 그 절망이 치료를 위한 모든 연구에 종지부를 찍고 나면 의사들은 그 살해자를 찾아내기 위한 조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 살해자, 대자연은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첫날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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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행위는 틀림없이 죽음과 밀접한 관련-예전이라면 이러한 관련을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견딜 수가 없다-이 있다. 만일 타이오가 살아 있다면 나는 녀석에 대해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녀석과 함께 사는 것만으로 행복할 것이며(불행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나는 녀석의 삶을 정리해보고 싶은 욕구를 억제할 수 없다. 녀석에게 또 하나의 삶을 마련해 주고자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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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유를 갈구하지만 막상 그 자유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모르고 있다. 가끔, 나는 말하곤 했다. 「개를 키우지 않게 되면 얼마나 편할까!」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개를 안 키우게 되면 후회하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부정해버리는 생각과는 달리, 그러한 바람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지 못할 만큼 나는 나이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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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중에, 나는 내가 무척 좋아했던 인도 또는 페르시아 시들의 운율에 따라 페이지들을 메워나가고 있다. 오마르 하이얌과 가젤 드 하피즈의 4행시들, 바르트리하리의 <샤타카(백 편 시집)>들에 담긴 운율. 사랑, 지식, 초탈을 이야기할 때, 백 절 각각에 담긴 바르트리하리의 어조는 가슴 깊이 파고든다. 그 짧은 형태, 숨가쁘고 급격한 운율이 내게는 심장의 박동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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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란 그 표현 수단을 찾게 되면 이슬처럼 증발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누구보다도 불행한 이들인 반면 누구보다도 불평할 것이 적은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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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과정-그런 것이 존재한다면-이란 어쨌거나 메스꺼운 것이다! 환자의 주변은 더럽기 짝이 없어서 내의며 담요, 모든 것을 끊임없이 갈아내야 한다. 이미 부패가 시작된 것이다. 아! 마침내 죽음이 찾아오면 모두들 한시름을 놓는다. 씻어내고 불태워 버리면 끝인 것이다. 자연의 무기물에 먼지와 진 흙이 더해지겠지만, 끊임없이 그러한 것들을 배설하던 삶의 시기에 비하면, 더없이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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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의 바람을 들어줄 이가 아무도 없으면 언제나 개를 한 마리 구한다. 개들의 눈에는 그들이 절름발이로도, 추물로도, 장님으로도, 귀머거리로도, 불구로도, 늙은이로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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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모두 공허할 따름이다. 이를테면 나는 말라비틀어진 상태에 놓여 있다. 내게 머무르던 감정의 거대한 물결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나를 엄습했던 그 물결 속에 언제까지나 잠겨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 물결은 언제고 곧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 메마름을 즐기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결핍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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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선으로 그려진 세상의 모습 너머, 점선으로 이루어진 형상들을 본다. 내가 본의 아니게 그것들에 눈길을 고정하게 되면, 그 형상들은 실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로 불어나고, 마침내 실선으로 그려진 세상의 모습은 사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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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많은 근심거리, 걱정거리들을! 그러한 염려들이 없으면 늘 소소한 공허감에 젖게 되고, 그보다는 근심, 걱정이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젯밤, 과일을 먹으려고 식당으로 내려갈 때, 나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았다. 부엌에 있는 바구니를 잠자리로 삼았던 개는 이제 사라졌으므로 녀석이 깨어나서 밖에 나가자고 조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염려가 내겐 더 행복한 것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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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서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녀석이 나를 방해했으면, 짐승들 특유의 그 거절 못 할 수법으로 산책을 하자고 보챘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녀석이 살아있다면 이렇게 글을 쓸 필요도 없을 것이고- 글쓰기는 삶과는 상반되는 것이므로- 따라서 방해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글을 채워나갈 종잇장조차 내 앞에 두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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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주인들, 애호가들은 개를 위해 특별히 고안해 낸 고유의 언어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또한 그들은 개들에게 말을 건넬 때 그들만의 독특한 말투를 사용하는데, 이때 말투라는 것은 그 말 자체의 뜻보다 더 큰 역할을 한다. 결국 그들은 개들과 그들 사이에서 일종의 동족성을 발견하기에 이르는데, 그러한 유사성은 주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토템신앙을 지닌 이들은 물론, 어린시절의 주변 사람들에게조차 그 동족성은 당연한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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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드의 지하 묘지에서도 인간과 동물은 격리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물들을 배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찬미하기 위해서였다. 따오기, 황소, 고양이, 개 들.... 각각의 동물들은 (종류에 따라) 그들만의 구역을 지니고 있었다. 그곳의 동물들은 미이라로서 위엄을 갖추고 인간에겐 양립 불가능하지만 동물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신의 속성들을 상징하고 있었다. 우주에 활기를 주고, 이해할 수 없는 단속적인 말로 힘과 지혜, 그리고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신의 속성들을.
-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