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양식/밑줄긋기
섬(Les Iles)
안녕마리
2010. 7. 28.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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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때 그들은 대자연과 다시 접촉하면서 자연 속에 푸근히 몸을 맡기는 보상으로 자신들을 살찌우는 정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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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루는, 내가 잠을 깰 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없애준다.
황혼녘, 대납의 그 마지막 힘이 다해 가는 저 고통의 시작이면 나는 내 불안감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고양이를 내 곁으로 부르곤 했다. 그 불안감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으랴? 나를 진정시켜다오, 하고 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밤이 다가온다. 밤과 더불어 내게 낯익은 유령들이 깨어 일어난다. 그래서 나는 하루에 세 번 무섭다. 내가 잠들려 할 때, 그리고 잠에서 깰 때. 확실하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 나를 저버리는 세 번. 허공을 향하여 문이 열리는 저 순간들이 나는 무섭다 - 짙어가는 어둠이 그대의 목을 조이려 할 때, 한밤중에 잠깨어 나는 과연 무슨 가치가 있는 존재일까를 가늠해 볼 때,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생각이 미칠 때. 잠이 그대를 돌처럼 굳어지게 할 때, 대낮은 그대를 속여 위로한다. 그러나 밤은 무대 장치조차 없다. 물루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나는 그의 몸 위에 내 시선을 가만히 기대어본다. 그러면 그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시금 믿음직스러워졌다.(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그의 현전(現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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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루는 행복하다. 세계가 저 혼자서 끝없이 벌이는 싸움에 끼여들면서도 그는 제 행동의 동기가 한갖 환상일 뿐임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놀이를 하되 놀고 있는 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볼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그를 바라보는 것은 나다. 조그만 빈틈도 없이 정확하게 몸을 놀려 제가 맡은 역할을 다하고 있는 그르르 바라보고 있노라면 황홀해진다. 매순간 그는 제 행동 속에 흠뻑 몰두해 있다. 먹고 싶은 것을 보면 그는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 접시에서 눈을 뗄 줄을 모른다. 그의 눈에 가득 찬 욕망은 치열하다못해 벌써 음식 위로 튀어올라가 앉는 것만 같다. 그가 무릎 위에 몸을 옹크릴 때도 제가 가진 모든 애정을 남김없이 쏟아가며 옹크린다. 행동에 빈틈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도리가 없다. 그의 행위는 몸놀림과 일치하고 몸놀림은 식욕과, 식욕은 그의 이미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야말로 끝없는 연쇄 조직처럼 일사불란하다. 고양이가 다리를 반쯤 편다면 그것은 다리를 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또 다리를 꼭 반쯤만 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희랍 꽃항아리들의 가장 조화로운 윤곽에도 이토록 철저한 필연성은 없다. 나 스스로를 돌이켜보노라면 이런 가득함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내가 인간이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즉 그냥 온전치 못한 존재라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연극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비틀거릴 것이고 내 상대역이 묻는 질문에 해야할 대답을 잊어버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있어도 있지 않은 부재(不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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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게 될 때면 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지게 마련이어서, 그런 것은 사실 우리들 자신에게밖에는 별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적절한 순간에 늘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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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질없는 문제에 대하여 박학해진다는 것은 마음에 든다. 인간의 삶이란 한갓 광기요, 세계는 알맹이가 없는 한갓 수증기라고 여겨질 때, '경박한' 주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내 맘에 드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살아가는 데,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루하루 잊지 않고 찾아오는 날들을 견디어내려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단 한 가지의 대상을 정하여 그것에 여러 시간씩 골똘하게 매달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
<케르겔렌 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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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바는 다름이 아니라 잡다한 현실로부터 벗어나서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일이었다(그렇지만 나도 정말 자연은 그런 자연 그대로의 상태라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은 투쟁이요 공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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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물질적인 구속 외에는 아무런 구속이 없이 (그때만해도 나는 물질적인 구속이 순전히 물질적인 것만은 결코 아님을 모르고 있었다.) 지내는 그 이상적인 생활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위적이며 속이 텅 빈 생활로 여겨지고 말았을 것이다. 처음은 항상 멋지게 마련이다. 다만 그 다음은 멋이 덜해진다. 카사노바가 플롬의 감옥을 탈출하여 리바 쉬아보니의 대기를 들이마셨던 아침은 얼마나 아름다운 아침이었겠는가! 그때의 도취한 기분은 쉽사리 짐작이 간다.그러나 그 역시 더 먼곳으로 도망쳐야 할 처지가 아니었더라면 에스클라본스의 해변도 다음날부터 당장 따분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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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 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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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회 신자들이 육체적 단련을, 불교 신자들이 아편을, 화가가 알콜을 사용하듯이, 그럴 경우 여행은 하나의 수단이 된다. 일단 사용하고 나서 목표에 도달하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데 썼던 사닥다리를 발로 밀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 데 성공하고 나면 바다 위로 배를 타고 여행할 때의 멀미 나던 여러 날과 기차 속에서의 불면 같은 것은 잊어버린다(자기 자신의 인식이라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초월한 다른 그 무엇의 인식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인식'이란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마치 위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여 그 악기의 위력을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대로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놓는다.
<보로메의 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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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친구가 편지하기를, 한 달 동안의 즐거운 여행 끝에 시에나에 당도하여 오후 두시에 자신에게 배정된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열린 덧문 사이로 나무들, 하늘, 포토밭, 성당 등의 소용돌이치는 저 거대한 공간이 보이자 그는 마치 어떤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어서(그의 방은 하나의 깜깜한 점에 불과했다) 그만 눈물이 쏟아져나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고 했다. 찬미의 눈물이 아니라 '무력함'의 눈물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 없이 감당하게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일순간에 그의 염원들의, 그의 사상의, 그의 마음의 무를 깨달은 것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주어져 있었지만 그는 어느 것 하나 가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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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누군가 말했듯이 이 짤막한 공간 속에 긴 희망을 가두어두자. 마죄르 호반의 자갈밭과 난간을 따라가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저 그것의 영광스러운 대용품들이나 찾을밖에.
-장 그르니에, 「섬」에서 발췌
장그르니에와 까뮈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사이여서인지, 혹은 번역자가 같아서 그런지 몰라도 소장하고 있는 또 다른 까뮈의 책과 문체가 상당히 비슷한 느낌이다.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확인한 건, 내가 프랑스 작가들의 글을 참 좋아한다는 것. 알차게 영글은 열매를 맛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