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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을 무기로 모든 책임을 벗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오만은 질색이었다. 클라이브의 친구들 중에는 필요할 때마다 천재라는 으뜸패를 내세우며 여차하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부류가 있다. 그들의 부재로 인해 어떤 불상사가 벌어진다 해도 그건 단지 직업 성격상 불가피한 일이며 그런 연출이 대중들로 하여금 그들이 부여받은 소명을 더욱 우러러보게 할 뿐이라고 믿었다. 이런 유형들은 친구와 가족에게 마저 작업 시간 뿐 아니라, 조는 시간, 산책시간을 비롯하여 침묵하는 매순간과 우울증과 만취 상태가 모조리 변명의 여지가 있는 고독의 목적을 담은 행위라는 믿음을 주려고 집요하게 애쓴다. 클라이브가 보기에 그건 평범함을 감추려는 제스처에 불과했다. 그 역시 예술의 숭고함을 의심치 않았지만 부당한 행동이 예술의 일부는 아니었다. 한 세기에 한두명 정도 예외는 있을 수 있다. 베토벤 같은 사람 말이다. 하지만 딜런토머스? 아니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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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서부의 한 모퉁이에서 하루하루작업에 열중해 있는 동안 클라이브는 문명이 디자인, 요리, 잘 숙성된 와인 등을 포함한 모든 예술의 종합이란 사실을 쉽게 긍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눈앞에 보이는 이 풍경이야말로 문명의 실체인 듯했다. 케이블 tv, 안테나와 위성안테나를 지탱하는 것이 존재목적인 초라한 현대식 가구단지,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허섭쓰레기를 생산하는 공장들과 거기서 나온 물건을 유통시킬 목적으로 무료한 주차장에 줄서있는 화물 트럭들. 어느 곳에나 거리와 교통지옥이 있었다. 그것은 떠들썩한 파티가 끝난 다음날 아침 같았다. 이렇게 되기를 원한 사람도, 그래도 되겠냐고 질문을 받은 사람도 없었다. 계획한 사람도 원한 사람도 없건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 안에 살아야 했다. 누가 수마일씩 이어지는 이런 풍경을 보며 선량함이나 상상력 혹은 퍼셀이나 브리튼, 셰익스피어나 밀턴이 한 때 이 세상에 존재했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기차가 속력을 내며 런던을 빠져나가자 간간이 시골 풍경이 나타났고, 그와 더불어 태초의 아름다움이 혹은 그에 대한 기억이 펼쳐졌다. 그러나 몇초 후 콘크리트 운하가 가로놓인 강과 울타리, 나무조차 없는 황량한 농경지가 불쑥 나타나면서 이내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말았다. 새로운 도로들은 중요한 것들은 모두 다른 곳에만 있다는 듯 끝도 부끄러움도 없이 멀리 뻗어갔다. 지구상 다른 모든 생물들의 번영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사는 실수를 넘어 그 시작부터가 오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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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나 아는게 없다. 대체로 우리모습은 빙산처럼 대부분 물에 잠겨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사회적 자아만이 하얗고 냉랭하게 밖으로 솟아있다. 그리고 여기 수면 아래 희귀한 모습, 한 남자의 은밀한 사생활과 혼돈이 있다. 그 사람의 위엄은 순수한 환상과 순순한 생각을 통해 불어난 절실한 욕구에 의해, 정복할 수 없는 인간의 요소인 정신에 의해 철저히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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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늠할 수 없는 산의 나이와 그 위로 덮인 생명체들의 정교한 그물이 그 역시 이 질서 속의 한 부분이며 보잘것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상기시킬 것이다. 그는 자유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