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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3. 19:36

 


<도도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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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은 2년 정도 다녔다. 그사이 나는 바에엘 두 권을 떼고, 체르니와 하농에 입문했다. 체르니란 말은 이국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아서, 돼지비계나 단무지란 말과는 다른 울림을 주었다. 나는 체르니를 배우고 싶기보단 체르니란 말이 갖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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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을 길게 뺀 채 모니터 앞에서 붙박여 있었다. 언니는 "흑백은 눈에 가장 피로를 많이 주는 색이라던데" 라며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100년 전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진보적인 기계 앞에서, 내 등은 네안데르탈인처럼 점점 굽어갔다.


<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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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란 누구라도 누구를 좋아할 수 있는,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근사해질 수도 친절해질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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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사라진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는 말이에요. 떠나고, 떠나가며 가슴이 뻐근하게 메었던, 참혹한 시간들을 떠올려볼 때면 말이에요.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요.


<자오선을 지나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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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는 눈먼 물고기처럼 인천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노선도를 올려다보며 역사의 수를 꼽아보았다.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50여개의 역이 있고, 영등포와 신길, 종로를 지나면 서울 불쪽 어딘가에 내 방이 있다. ...... 도시의 이름을 가진 점과 그 사이를 잇는 직선. 나는 그것이 카시오페아나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라 불리는 이국 말로 된 성좌처럼 어렵고 낯설었다. 내가 모르는 도시의 별자리. 서울의 손금. 서울에 온 지 7년이 다 돼가는데, 그중에는 내가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가 많다. 땅속에서 바람을 맞으며 안내 방송을 들을 때마다 나는 구파발에도, 수색에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것은 서울의 크기가 컸던 탓이 아니라, 내 삶의 크기가 작았던 탓이리라. 하지만 모든 별자리에 깃든 이야기처럼, 그 이름처럼, 내 좁은 동선 안에도- 나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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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 비치는 내 얼굴을 살펴보았다.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문득 내가 모르는 얼굴이 나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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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 63빌딩이다." 내 마음의 데시벨은 너무 낮아 누구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그때 분명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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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노량진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일들이 떠올랐다. 내 인생의 성좌 중 어느 한 점. 유난히 흔들리며 약하게 빛났던 작은 별에 깃든 이야기. 노량진. 좌절된 꿈처럼 그곳을 감싸 안고 있던 성운과 고운 색의 먼지들.


<칼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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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건강하고 아름답지만 정장을 입고도 어묵을 우적우적 먹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음식을 우적우적 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촌부. 어머니는 칼 하나를 25년 넘게 써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을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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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마분지에 둘둘 말은 칼을 품고 산동네를 오르던 어머니의 가슴은, 흡사 연애편지를 안고 달리는 처녀처럼 마구 두근거렸더랬다. 그 후로 어머니는 손안에 반지의 반짝임이 아닌 식칼의 번뜩임을 쥐고 살았다.*나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에게 애인이 있는 것처럼 어머니에게도 남자가 있길 바랐다. 노동 후 잠든 어머니의 잔등을 쓸어주고 주름진 얼굴을 만져줄 수 있는 그런 손길이. 사람에게는 의당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나 하고. 이런 도덕관을 갖게 된 데는 동네 분위기 탓이 컸다. 이상하게 우리 동네 어른들은 전부 애인이 있었다. 중년 아저씨들 사이에서는 대놓고 언급되었고, 없으면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주머니들은 훨씬 영리하게 바람을 피웠다. 그러나 내가 본 시골의 부정은 티브이 드라마처럼 심각하고 치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때론 명랑하며, 은밀한 동시에 소란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시골에서 부는 그 바람이 오래전부터 세계를 움직여온 하나의 '운동'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는 그것을 실수라, 누군가는 사랑이라, 누군가는 불륜이라 했다. 나는 그것의 온당한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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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 완료를 기다리는 순간에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제 주소를 찾아가는 활자의 이동이 어떻게 가능한지 감이 오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천만 명이 수천만 개의 문자 메세지를 주고받는데. 어째서 이 사람의 '미안하다'와 저 사람의 '괜찮다'는 부딪치지 않고 온전히 상대방의 단말기로 미끄러져갈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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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보이는 신림은 생각만큼 푸르지 않다. 2호선 색깔처럼 연한 초록빛을 하고 있을 것 같던 나무들은 모두 앙상하게 헐벗어 있다. 은행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거리는 지방 소도시 몇 개를 기워놓은 듯하다. 낡고 일관성 없는 잡지처럼 산만하다. 그리고 왠지 시간이 고여 있는 느낌이다. 신림뿐만 아니라 서울 대부분의 거리가 그랬다는 기억이 난다. 이것저것을 오려다 마구 붙여놓은 느낌. ..... 어쩐지 이 도시가 하나의 거대한 풍문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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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방은 3층 복도 끝에 있다. 수십 개의 똑같은 문이 잔혹 동화처럼 펼쳐져 있다. 그러려니 했는데도 막상 그 앞에서니 숨이 막힌다. 어느 방 문고리에 흰색 보자기를 덧씌워 놓은 게 보인다. 분홍 자수가 놓인 수예품이다. 문득 그 방 학생은 어디에서든 자기 마음에 정원 한 뙈기는 떼어놓고 살 것 같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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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 고시 인구가 2만 명 정도 된다던데. 여기를 지나간 이들 모두가 일제히 숨죽이며 살았겠구나. 2만 명의 침묵, 2만 명의 뒤꿈치, 2만 명의 불면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게 어떤 공간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몇 십 년간 반복되었다는 것이.


<네모난 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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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기분 좋은 소리 안에는 바람이 들어 있다. 바람 '풍'자의 날렵한 꼬리 안에 매달린 어머니의 말들이, 낱말의 풀씨들이, 골목 같은 내 핏속을 돌아다니다 어느 순간 툭-하고 발아하는 소리처럼. 내 입속 말들이 세계를 떠돌다 당신 안에 들어가 또다른 말을 틔우는 소리처럼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사라진 말과 사라진 기억, 끝끝내 알 수 없거나 애초에 가져본 적 없는 장면, 그러면서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같이 느껴지는 풍경과 함께, 무언가 실종된 것들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먹고 자란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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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전속력을 다해 한강을 자나는 찰나, 창문 안으로 20세기 풍경이 박살 난 채 쏟아지는 순간이 올 때면 재빨리 몸을 틀어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다리 아래서 고요하게 빛나던 강, 서울의 큰 강. 그걸 볼 때마다 나는, 뜨거운 차를 마셨을 때와 같이 정갈한 고독이 가슴 아래로 내려가는 기분과 함께, 내가 떠나온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것들이 늘 그렇듯, 그것은 늘 금방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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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아파트 단지 너머로 저녁 해가 기울고 있었다. 나는 지난한 하굣길을 걸어 나갔다. 어쩌면 새로운 환경과 스무 살에 답할 수 없던 질문 앞에서, 내 속에 있는 문법들을 새로 뜯어고치고 있던 몸속 사정과 달리, 사방은 고즈넉했던 것도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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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아니었으면 결코 만날 일이 없었을 우리는, 문학 따윈 까맣게 잊은 채, 서로 맘에 둔 사람이나 곁눈질하며 호기롭게 골목을 걸어 나갔다. 이제 막 친밀감을 갖게 된, 그리하여 거기서 조금만 더 서로를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우스갯소리와 거짓말이 골목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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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플라이데이터리코더>


-김애란, 「침이 고인다」에서 발췌